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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자유롭게/그리운경상도

천년고찰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는걸 보았다하여 지어진 이름 관룡사..


천년고찰 아홉마리 용이 승천하는걸 보았다하여 지어진 이름 창녕 관룡사..


여행일자 2012년 1월24일~25일 나를 찾아 떠난 사찰여행 1박2일..

모처럼 하루종일 딩굴딩굴.. 물먹은 솜처럼 묵직했던 몸이 가벼워진듯하다

매일 시간에 쫓기거나 바쁘게 돌아가는 패턴속에서 현기증이 느껴진다면

모든걸 다 뒤로 미뤄놓고 하루종일 누워있는것도 나쁘지 않다는걸 

느껴본 하루였던거같다... 깊게 단잠을 자고 일어난 지금시간 새벽 4시..

창문을 조금 열어보니 새벽 찬 바람이 콧속까지 들어오는걸 느끼겠다

잠을 다시 청해볼까 하다가 어차피 잠도 오지 않을거같아 커피한잔을 타온다

새벽에 일어나 커피를 타와선 컴퓨터앞에 앉아 밀린 여행기를 쓰곤했는데

이제는 버릇처럼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되어 버린거같다...

사진만 정리해놓고 여행기를 쓰지 않은곳중에서 가장 최근에 다녀온

관룡사의 사진을 꺼내와선 그날의 추억을 생각하며 여행기를 써 보러고한다.


창녕에 위치한 관룡사.. 신라시대에 건립된 천년고찰이라고 했는데 신라 진평왕 5년 (583년)에 

증법국사가 초창하였다는 설과 또 다른 하나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200여년전 신라 흘해왕 40년

(349년)에 약사전이 걸립되었다는 설이 있으니 두가지 경우를 따져보더라도 최소한 지금으로 부터 

1500여년전에 건립된 천년고찰이였다는걸 입증해 주고 있었다..

또한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중의 한곳이며 원효대사가 제자 1000여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화한 도량이였으며 국가에서 지정한 4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는 귀중한 곳이기도 하다..

관룡사라는 이름은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칠성 100일기도를 마치던날..

화왕산 정상 월영삼지에서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광경을 보았다고 하여 볼관자에 용용자를

써서 관룡사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그 뒤산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관룡사를 알리는 초입에서 내려서 관룡사 일주문까지 느린걸음으로 천천히 걷고 싶었지만

통도사까지 가야하는 먼 여정이 남아있기에 차로 이동하면서 밖으로 보이는 풍광을 즐기기로 했다..


관룡사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서로 마주보고있는 장승이 한쌍 서 있었는데 돌로 만들어진 석장승이였다..

장승의 기원은 고대 성기숭배에서 나왔거나 사찰토지의 표지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장승을 지방에 따라 벅수 벅시 법수 수살목 당산할배 등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왼쪽이 남장승이고 오른쪽이 여장승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상투와 같은 둥근머리와 왕방울같은 눈..

주먹코 등 투박하게 표현되어있었고 여장승은 남장승에 비해 부드러운 턱선을 가지고 있었다..

절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입은 다물고 있었으며 입술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돋아나 위협적이였다

수호신이나 풍수지리적으로 허한곳을 보충해주는 비보 등을 목적으로 세워진 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에 민첩한 관계를 있다는걸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관룡사는 일주문이 따로 없었으며 일주문 대신으로 층층이 쌓아 올려놓은 돌문을 통과 해야했다..

작은키였지만 문을 드나들때 혹여 머리라도 부딪치지 않을까 해서 고개를 숙이며 들어갔고

높게 솟아있는 일주문에 비해 관룡사의 일주문은 낮게 숙일줄 아는 겸손을 배운거같다..

쌓아놓은 돌문과 돌담이 파란 겨울하늘과 잘 어울리는데 이날이 하늘은 마치 가을하늘처럼 맑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우리들이 눌러대는 카메라의 셔터소리만 들려올뿐 사람이 있는데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아주 작고 녹녹함이 묻어나는 그런 사찰이였다...

혹시라도 내 행동이 누가 될까바 평소보다는 다소 정숙한 모습으로 사찰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보물4가지와 함께 관룡사를 구석구석 담았던거 같다..




관룡사의 4개의 보물중 한개인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정면3칸 측면3칸인 

다포식 건물로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 지붕으로 되어있었다...

특색으로는 단청이 금단청이였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이라고 했는데 관룡사에 도착했을때

대웅전안에선 설법중이라 열어보지 못해 그냥 와야만 했던 아쉬움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때 불탄것을 1618년에 다시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사찰을 여러곳 둘러봤지만 관룡사처럼

대웅전이 작고 아담한곳은 없었던거같다.... 천년고찰의 명성치곤 소박하다..



임진왜란때 관룡사에 있는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으나 유일하게 약사전만 불타지 않았다고한다..

이는 오직 부처님의 영험한 힘으로 화마를 물리쳤다고 전해지는데 관룡사의 4개의보물중 하나인

약사전은 보물 제 146호로 지정되었으며 약사전앞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삼층석탑의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방식이라고 하는데 몸체부분은 파손이 되고

1층 지붕돌도 몸전체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 석탑을 쌓아올린 기법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약사전은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의 맞배기와집이며 이 건물은 지붕이 기둥간격에 비해 두 배 가까이 길어 면적이 

좁아 보이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균형잡힌 안정감이 있어 보였으며 약사전안에는 4개의 보물중 한가지인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고려시대 불상양식을 따른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519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룡사의 4개의 보물중에 또다른 한개는 용선대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인데 보물 제295호 지정되어있다..

용선대는 관룡사 뒤편으로 500여미터를 걸어올라오면 만날수있는데  여래좌상은 관룡산 정상 부근의 수십길

낭떠러지 위에 혼자 앉아있는 신라시대 불상으로 세상을 굽어 보는듯 먼곳을 주시하고 있다..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부처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이며 보물 제295호로 지정되어있다

머리에는 둥근 육계와 나발이 올려져있으며 사각형의 얼굴이지만 동글동글 둥근맛이 있다고한다..

조금 뜬 길다란 눈과 짧고 넓적한 코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띤 온화한 표정이였으며 

바라보고 있는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근심걱정은 씻은듯 없어질것만 같았다..

불상 뒤편으로는 건물이 없었던듯하며 이곳에자리를 정하는데에는 땅의 기운을 누르려는

신라하대의 도참사상이 작용한듯하다고 하는데 도참사상은 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사상이며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이 섞여 있어며 주로 혼란한 시대에 나타난다고한다...


용선대에서 내려와 관룡사를 다시 천천히 둘러보면서 관룡사에서 찾았던 보물4개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설날이 하루지난 정초부터 함께 해준 사람들이 나에게는 가장 큰 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 시간이 없어서 함께 하지 못한 동갑내기 친구도 그날 유난히 보고 싶었던 하루였다..

나를 찾아 떠났던 사찰여행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보물3개를 찾아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