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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자유롭게/그리운곳서울

오랜역사 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한 궁궐 창경궁..

 

 

자연미와 왕실생활이 조화를 이룬 궁궐 창경궁..

 

여행일자 2012년 10월2일 추석연휴 미뤄뒀던 궁궐여행중 창경궁..

오랫동안 미뤄뒀던 서산여행을 다녀오고 어제까지 여독이 풀리지않아

잠과 한바탕 전쟁을 치뤄야만했다... 몸이 예전 같지가 않음을 실감하겠다

몇날 몇일을 잠을 안자고 여행을 해도 멀쩡했던 체력이 이젠 슬슬

저질 체력으로 변해가는듯 하루를 지내고나면 나이먹고 있다는걸 느끼겠다

젊었을때가 좋은거야 젊을때 좋은거 많이 먹고 많이 돌아다녀야해..

귀에 딱지가 생길정도로 말했던 우리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이젠 나도 우리할머니처럼 젊은게 좋은거야.. 하고 말했던 그나이가

되어가고  가끔씩 철딱서니 없이 행동하기에는 내나이가 많다는걸

생각해야 할 모양이다... 가을을 대책없이 떠나보내고 이젠 겨울..

그리고 대책없이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서글픈 내 청춘이다..

 

지난 추석때는 미뤄두었던 궁을 돌아보았다.. 경복궁과 창경궁 그리고 창덕궁까지..

역사를 되짚어보는 의미있는 여행이였기에 더 만족스러운 여행이였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경복궁 향원정을 시작으로 창경궁이야기를 할려고 하는데 우리나라 궁 중에서 가장 작은 궁이지만

이곳에서 있었던 크고작은 사건들은 다른궁 몹지않게 많았던 곳이였다는걸 알게되었다..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9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을때는 창경궁 홍화문앞까지 백성들로 가득메워 눈물을 흘렀으며 귀국한지 두달만에

갑자기 병이 나서 병석에 누운지 3일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우리나라의 근대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올정도로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었을때도 외교관역활을 톡톡히 해냈다고하는데

소현세자가 죽었을때 까맣게 변해있었고 뱃속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했다는데 청나라의

신임을 얻고있던 세자를 독살했을거란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고한다... 그리고

비운의 왕자였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던 곳이  창경궁 문정전이였다 한다..

문정전 앞뜰에 놓인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동안을 신음하면서

28세의 젊은 생을 비참하게 마감했는데 영조는 세자가 죽은후 그를 애도한다는

의미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한다.... 그밖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으며 숙종시절때는 그 유명한 장희빈이 인현왕후였던

민씨를 폐위시키고 인현왕후를 저주하기위해 꼭두각시등 동물의시체를 통명전 주변으로

묻어 두었던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은곳도 이곳 창경궁 통명전이였다고한다..

 

창경궁을 방문했을때는 추석의 연휴기간이라 방문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으며 카메라 앵글속으로

심심치 않게 들어오는 사람들은 결국은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놓지만 도리가 없다

나또한 황금연휴 추석에 궁여행 계획을 잡았으니 나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어디 한두명일까..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경복궁에서 처럼 조선시대로 돌아가 여기 와있은 사람들이

모두들 나를 따르는 무수리나 후궁 그리고 상궁으로 생각한다면 더 흥분되는 궁여행이 될것을

 

창경궁을 소개할때 자연미와 왕실 생활이 조화를 이룬 궁궐이라고 한다..

창경궁은 조선 9대 임금이였던 성종이 1483년에 세웠으며 창덕궁과 경계없이 하나의 궁궐로

사용하여 둘을 합쳐 동궐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이에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명이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보완하면서 공사도중 창경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다

 

 

 

 

여느 궁에서 본거처럼 화려한 팔작지붕의 화려함이 돋보이는 궁의 모습... 선이 곱다

아름답고 한편으로는 경쾌한 느낌을 주는 궁궐의 품위를 보여주는 정문인 홍화문은 예전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 하기도 했던 곳이며 정조는 가난한 백성에게 쌀도 나누어주었다한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광해8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는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인 명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과 비교를 한다면 그 규모가

제일 작다고 하는데 국정을 보기위함이 아니라 왕대비등이 생활공간으로 더 쓰였다한다

사도세자의 안타까운 죽음과 국왕이 정무를 보던 문정전과 임금과 신하의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진곳 숭문당과 앞마당이 넓은 곳에 위치해 있으며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곳으로 이용되었던 함인정은 그곳에 앉아 있는것만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정자였다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과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라고 한다

왕과 왕비의 일상적인 생활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는데 대장금을 신뢰하여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던 중종도 이곳 환경전에서 승하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품위를 갖춘 내전의

중심전각인 통명전과 양화당은 왕비의 침전과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통명전은 숙종때 장희빈이 인현왕후였던 민씨를 폐위시키고 저주하기위해 통명전 주변으로

꼭두각시인형과 동물의 사체를 주위에 묻어 두었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은곳이기도 하다..

 

 

 

 

 

 

 

 

 

창경궁도 다른궁궐들 처럼 임진왜란때 불에 탔다가 1616 광해 8년에 재건되었다한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였던 궁궐은 일본의 훼손에 의해 왕궁으로서의 존엄성 마저 잃게 되었는데

1907년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은 대부분 다 헐어내고 그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 했고

그것도 모잘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였으며 1911년에는 창경궁이라는 명칭마저 창경원으로

격하 시켰다고 하는데 차마 욕은 못하겠고 도저히 용서가 되지않은 족속들이다 일본**들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부르는것도 부족해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해서 맥을 끊어버렸다

나중에 글로 쓰겠지만 경복궁도 도로를 개설해서 궁을 크게 훼손시켜 놓았다고한다...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궁궐의 모습을 되살린게 1983년이였으니 70년을 넘게 치욕속에

살아야 했던 그 세월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아직까지 많은 전각은 복원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문화를 느낄수 있어서 좋았던 궁궐여행이였다..

 

추석연휴동안 돌아본 궁궐여행중 창경궁... 궁궐을 돌아보면서 나라의 소중함도 느껴본 여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