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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자유롭게/그리운경상도

손가락으로 가르킨 명당터에 절을 세웠다는 김천 직지사..

 

손가락으로 가르킨 명당터에 절을 세웠다는 김천 직지사..

 

여행일자 2011년 10월15일 단풍이 덜 들었던 가을로 접어들던날..

그동안에 여행기가 많이 밀려있긴 하나보다.. 가을에 다녀온 여행기를 더이상

방치해둘수가 없었기도 했고 겨울의 아름다운 여행지를 가기위해선

작년에 묵었던 여행기를 빨리 소진(?)하고 싶은 이유도 있는데 더 큰이유는

그 당시에 그곳에서 느꼈던 감흥들을 조금 지난다음에 글을 쓰게되면 그때의

감동이나 감흥이 글속에 그대로 전달되지 않아 글을 올릴때마다 속상하기도하다

그나마 어렴풋이 남아있는 그때의 감정들이 모두 사라지기전에 다이어리에

가끔 짧은 메모를 해두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지않을때가 더 많다

올해는 다녀온 여행지를 묵혀두지않기위해 부지런을 떨어보러고 한다..

그리고 나를 찾아 떠났던 사찰여행에선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온듯해서 이틀동안

운전을 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오히러 기운이 솟아난다...^^

 

단풍이 조금 아쉬웠던 작년 가을에 다녀왔던 김천 직지사는 사찰내에 단풍터널로 유명하기도하지만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르키며 명당터를 알려주었고 그곳에 사찰을 지웠다고해서

곧을직 손가락지를 따서 직지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고 했다...  또 한가지는 아도화상은 고려시대의

승이며 신라땅에 불법을 전하고자 일선주에 와서 숨어살다가 신라왕녀 성주공주의 병을 고쳐주게

되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불교가 허용되고 황악산아래 절을 지어 직지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이래 신라시대에 두번의 큰 중건이 있었다고하는데 두번째 중건때는 천묵대사가 금자대장경을

서사하고 경순왕이 경명제자를 썼는데 이는 고려 대장경보다 590년이나 앞서 직지사에서

금글씨로 대장경을 펴냈다고 한다... 또한 직지사는 사명대사의 출가사찰로 유명한곳인데 1559년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어 직지사로 출가한 사명대사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승병을 조직해 왜병을

물리치고 전후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하여 조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한다..

 

 

 

 

 

직지사까지 올라가는 길은 휴양림에 온듯한 착각이 들정도로 무성한 나무들로 가는길을 반겨준다

듬성듬성 단풍이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2% 아쉬움을 남겨둔다... 가을이 깊어가면 단풍길이 풍성할거란

생각도 해본다..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나를 돌아보고 싶을때면 한번쯤 더 찾고 싶은 사찰인거같다..

 

 

직지사의 대웅전은 2층 5간의 웅장한 모습이였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는데 영조11년때 중건되었다한다

대웅전앞에 삼층석탑은 1974넌 문경 도천사지로 부터 이전한것으로 보물 제606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의 후불탱화는 보물 제670호인데 영조20년에 조성된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대웅전

외벽3면에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선종화가 그려져있는데 사진으로

담지 않은 나는 그 그림을 눈으로 가득 담아왔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대웅전 후불탱화를 꼭 보기 바라며..^^

 

 

 

 

 

 

 

 

 

 

 

지금 생각해보니 단풍이 아예 없었던건 아니였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수수한 모습에

그걸 사진으로 담기위해서 한동안 서있었던 것도 생각이 나며 단풍나무 터널에서도 잠시잠깐 걸음을

멈춘채 터널속에서 길을 잃을듯 넋을 놓고 나무만 뚫어지게 바라봤던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나이는 세월은 그리고 시간은 내 기억력을 흐트려 놓지만 언젠간 그곳에 다시 찾아간다면

흐트려졌던 기억들이 퍼즐 맞추듯 내 기억을 맞춰갈거라 생각을 해본다..

 

 

설연휴가 지나고 1박2일동안 나를 찾아 떠났던 사찰여행에선 난 무엇을 내려놓고 왔으며

또 무엇을 다시 가지고 왔는지는 조만간 여독이 풀리는데로 늘어놓을까하는데 여행내내 잔잔하게

나를 감동했던 그 무언가가 있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