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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자유롭게/그리운경상도

한국정신 문화의 창출지이며 최초 사액서원 영주 소수서원..

 

한국정신 문화의 창출지이며 최초 사액서원 영주 소수서원..

 

여행일자 2011년 단풍이 아름다웠던 10월23일..

여행가이드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보다 더 많은 굴곡이 있는거같다..

봄철 코피까지 쏟아가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전라도행 기차를 타야했었을때도

온 천지가 단풍으로 물들어 사람마저도 알록달록 물이든것처럼 아름답던

가을날 단풍시즌때도 피곤한줄 모르고 오늘 다녀온곳을 그뒷날 또 간다고해도

지겨운것도 전혀 모른채 그렇게 봄시즌 가을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덧 얼마남지않은 날들속에서 또 아쉬운 한해를 보내야하는 끄트머리에

서있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있어서 여행은 내 삶에 비타민과도 같다..

하지만 비타민도 가끔 떨어질때가 있듯..^^ 지금은 봄이나 가을처럼 바쁘지 않다

그러다보니 점점 게을러 지는거같고 생각들마저도 도태해져가는거 같기에

면접을 보고 지금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난 여전히 여행을 꿈꾸고있다

 

전날 과음을 한탓인지 쓰린배를 부여안고..^^ 해장국을 먹고 강화도로 건너가 커피도 한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모처럼 게으른 여유를 느끼며 시간가는줄 모른채 수다삼매경에 빠져있었다..

회사로 복귀하면서 현장소장님과 여행이야기를 하면서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 이야기를 하게되었는데

아... 맞다.. 영주에 소수서원이 있었지.... 단풍이 아름다운 10월에 다녀왔던 그곳 소수서원..

그동안 태백을 다녀오고 삶에대해서 조금 방황하고 있는 동안 소수서원을 까맣게 잊고있었다

한국정신문화의 창출지이며 최초 사액서원이였던 영주의 소수서원.. 그곳 느낌이 참 좋았었는데..

 

소수서원...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선생이 고려말 유현인 안향선생의 연고지에

중종37년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명종 5년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군수를 재임하면서 나라에 건의하여

왕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게되고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이 되어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를 포함해서 4천여명의 유생들을 이곳에서 공부를 하였다고한다..

주세붕이 서원을 건립하고 성리학을 주제로 선비문화를 재조명한 이황에 의해 자림매김을 한다..

 

학자수림이라고 했던거같다.. 겉과속이 모두 붉다하여 적송이라 부르며 3백년에서 길게는

천년에 가까운 적색소나무 수백그루가 서원주변을 더 빛내고 있었고 추운겨울을 이겨내듯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 라고 불렀다고한다..

 

 

 

신재주세붕이 창견하고 서원담밖 풍광이 수려한곳에 위치해있는 경렴정과 푸른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 하여 이름이 지어진 취한대까지..

경렴정과 취한대는 소수서원을 찾는 이들도 풍류를 즐기면서 시한수를 짓게 하는거같다..

 

백운동 경자가 새겨진 경자바위는 바위에 새겨진 백운동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 글씨로 전해오고

붉은색의 경자는 신재 주세붕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것으로 신재집에 전해오며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의 머릿글자라고 한다..  세조 3년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영주

순흥 사람들은 정축지변이라는 참회를 당하게 되어 그때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죽께를 따라

10리를 흘러가 멎은곳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하는데 참화때 희생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를 듣게되어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선생이 각한 글씨에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위해 붉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더니 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본문에 경천애인이란 뜻은 하늘을 숭배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뜻이 내포되어있고..

정축지변과 절의지향은 세조 즉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의 자리에 오르자

세조3년인 1457년 그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반대하여 이곳 영주 훈흥으로 유배와

단종복위운동을 펴다가 그일이 탄로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희생된 의로운 고장임을 뜻한다..

 

 

 

 

 

 

 

소수서원은 경렴정과 취한대를 비롯하여 유학새이 공부하면서 묵었던 기숙사자리에 세워진

학구재와 지락재, 직방재와 일신재, 도서관으로 불리우는 장서각과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된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는 안향선생과 주세붕의 제를 모신다는 문성공묘 그리고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었던 강학당은 배흘림기둥의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있었다.

소수서원 내에는 국보인 회헌초상과 보물 5점 도유형문화재 3점을 비롯하여 유물과 전적등이

소장되어있다고하니 느긋한 시간을 가지고 국보와 보물을 찾는 즐거움을 만끽하길 바래본다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돌아보면서 왜 영주를 선비의 고장이라고 했는지 조금은 알수있을거같았다

소수서원 옆에 선비촌은 사라져가는 선비문화에 대한 선비정신도 배워볼수있다..

 

 

 

 

 

 

 

 

해설자와 함께 소수서원을 돌아보면서 천천히 주변경관도 즐기기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유독 은행나무가 많은 영주는  시화가 은행나무라고 했다.. 이곳 소수서원에도 은행나무가 참 많았다..

선비의 고장 영주.. 옛부터 전해져오는 선현들의 풍류와 멋을 맘껏 느낄수있었던 소수서원..

지금쯤이면 하얀눈으로 덮혀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