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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자유롭게/그리운충청도

생각보다 많은 역사를 가지고있는 해미읍성..

 

생각보다 많은 역사를 가지고있는 해미읍성..

 

어느곳을가든 느낌이 참 좋은곳이 있고 좋은 고장이 있는데

그중 한곳이 서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년에 두어번은 꼭 다녀오게되는 서산은 올 겨울에 한번 다녀올때는

시간이 되지 않아 해미읍성을 둘러보지 못한채 읍성안에는 어떤것

들이 주로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떨쳐버릴수가없었다

그 궁금증이 오래 가지는 않지만 가끔씩 생각났던 해미읍성

파란하늘이 맑은날 서산해미읍성을 다녀왔고 난 평소에

궁금했던 해미읍성안에 풍경을 차근차근 담기에 바빴다

유구한 역사와 찬란했던 문화가 숨쉬는곳 서산 그리고

그동안 아주 짧게 알고있었던 해미읍성에 대해서 다시

돌아볼수있는 기회가 된듯해서 좋았던 하루였다..

 

사적 116호로 알려진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 해미면에 위치해 있으며 다른 읍성과

비교할수 없는 격조높은곳이라는 생각과 함께 많은 역사를 가진 해미읍성을 느낄수가있었다

조선시대 해안지방에 자주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해를 입혀온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덕산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옮겨 쌓은것이라 한다

이 성을 쌓게 만든 사람은 조선조 세번째 임금인 태종이였고 그때 이름은 해미내상성이라

불리웠으며 230여녀간 종2품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충청도의 군사중심지로서

군사권은 물론 내란방지등 사회질서의 기능까지 담당하는 격이높은  성이였다 한다

그후 일제 강점기때 군현제가 폐지되고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해미읍성이 역할이

끝났으며 관아 모든 건물들이 매각되거나 훼손되었으며 읍성안에 면사무소 초등학교등

기관과 민가가 지어졌는데 1963년 사적 116호로 지정되면서 1970년때부터 다시 발굴및 복원공사

를 시작으로 성내의 관공서나 학교는 모두 성밖으로 이주 시키고 제자리를 잃은

동헌, 객사, 옥사, 민속가옥등을 복원하고 있었다

 

 

 

 

 

읍성안에 들어가보면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300년이상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가 있다

해미읍성의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서 이 나무의 동쪽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애를 매달이 고문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어찌보면 한서린 나무임에 틀림없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곳이라 한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있는 옥사를

발굴 작업뒤 복원하고 재현하였으며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는곳이다

정조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이후

더욱더 극심해졌다고하는데 군사권을 쥐고있었던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13개 군현에 해당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이곳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많은 신도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장소이기에

1965년부터 성지조성운동이 시작어 매년 수만명의 성지순례 행렬이

이러지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순교성지이기도 한다

 

 

 

 

 

 

 

병마절도사를 비롯하고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이 행해졌던 동헌과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자가 새겨진 전패를 모시고 삭망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던 객사 있는데 이번 태풍영향으로 상채기가 남아있었다

 

 

 

 

 

 

 

어딜가든 역사적으로 사연이 깊은곳은 많다.. 그래서 몰랐떤 그곳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것도 지금껏 살아온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 배우는것같아 뿌듯해지지만

천주교 박해 집단순교지였던 해미읍성에서는 숙연해지는 마음까지 배우고 온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