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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자유롭게/그리운경기도

천험의 군사요충지와 손돌의 충성이담긴 덕포진...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바닷길과 중요한 군사시설의 요충지였던 김포덕포진..

 

학교에서 배웠거나 아니면  여행프로그램속에 포함되어있어서 아무생각없이 다녀온곳이있는데

그중에 한곳이 대명포구쪽에 위치한 덕포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곳 덕포진은 예전에 강화도 여행을 하면서 시간이 남으면 가고 시간이 안되면 가지말자..

하는 그런 의견속에 마침 시간이 남아 초지대교를 건너 잠깐 들러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한바퀴

돌아봤을뿐인데 남들이 덕포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나도 그곳에 다녀왔어..

하고 말을했고 그곳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하면 금새 말문이 막혔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이 물어보는 사람이 그동안에 없었다..^^

여행의 맛을 알아가고 여행을 하면서 아무생각없이 예전에 갔던곳을 하나둘씩 둘러볼때

강화를 다녀오는 길에 덕포진을 다시한번 찾아가 예전에 가졌던 덕포진의 기억위로

새로운 느낌의 덕포진을 덮어쓰기 해보면서 여행일지를 새로 기록해본다

 

사적 제 292호로 서해로부터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어구인 손돌항에 천험의 요새를 이용한

군사의 요충지이고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을 겪은 조선선조때 창설된것으로 추정된다고한다

조선조 숙종8년 3월까지 월곶진이 주진이었으나 그후 덕포진을 주진으로 승격하여 영종과 안흥진을 관장하였고

숙종 20년 통진현이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덕포진도 강화도로부터 통진으로 그 예속이 변경되었다

덕포진은 군사상으로 강화통어영에 속하고 행정상으로는 통진에 속한다

손돌항포대와 돈대 사이에는 파수청 4칸을 건립하였고 광무 3년에 편집돈 김포읍지및 지도성책에 따르면

1876년 봄 손돌항 포대 15기에 건립하여 국토방어 시설을 갖추게되었다

1970년 전 김포문화원장 김기송씨를 중심으로 대곶면민이 복원하여 현재까지도 복원중이라고한다

 

 

 

덕포진의 포대는 총 15대포대가 발견되었으며 지금 이곳은 약물터 가포대라고 설정하였으며

이 포대말고도 원둘터를 나포대지역 굽두리를 다포대라고 했다

지금 약물터 가포대는 7개포대로 강화 남장포대를 향하고 있다

나머지 나포대는 강화초지진을 다포대는 초지진과 남장포대를 향하고있다

 

 

 

가까이서 찍어보니 사람 옆모습을 닮은 얼굴바위도 있다..^^

 

 

 

 

포대 안에는 커다란 돌들이 한개씩 놓여있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해설자이신 김기송님께 여쭤봤더니 포를 쏘게되면 그 힘에의해서

포가 뒤로 나가는걸 막기위함이라고하는데 발굴때부터 그곳에 있었다고한다

 

 

 

각포대의 공급할 불씨를 보관했던 장소인 파수청..

문헌 조사에 의하면 사적지내 건물은 탄약고, 파수청이 존재하였음을 알수있으나

현재 탄약고는 덕포마을에 이전 위치하고 있고 사적지 내에는 파수청만 현존하고있다한다

중심부에는 화덕이 있으며 발굴당시 동서면에서 석벽으로 둘러 쌓여있던것으로봐서

출입구는 동서면이 아닌 남북면을 이용했을것으로 추정된다

 

선돌공의 전설이 내려온다는 그곳인데 멀리서 보이는 바다 한가운데가 물살이 쎄다

신기하고 이상해서 물어봣더니 그곳에 바위가 있어서 그곳에만 물살이 쎄다고하는데

바위가 아니고 그곳에가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꺼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게했다

대명포구에서 고기잡은 배들이 블랙홀처럼 이곳에 빠져 다른 세계로 갈거같다 아직도

이런곳을 보면 무서운 생각부터 드는 바람.... ^^ 우째...ㅡㅡ

우주공상만화나 영화를 보면 블랙홀로 빠지는데 너무 많이봤어..나만 그런 생각을 하나...

아닐꺼야 다른사람들도 저걸 보면 나처럼 같은 생각을 하고있을지도몰라.. 맞아... ^^

 

이곳은 선돌공이 묘가 있는데 선돌공과 선돌바람의 이야기를 들을수가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서기 918년 고려 태조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제23대 고종에 이르기까지 314년간 음모, 변란, 외침등으로

많은 국난을 겪어왔는데 서기 1231년에 이르러서는 몽고병이 대거 침입하여 고종은 위급을 면하려고 화평을

내세워 돌려 보냈으나 몽고의 부당한 조공의 요구에 불복 최후까지 항전할것을 결심하고

1232년 고종19년에 강화로 파천하게 되는데 고종은 충신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서

손돌이의 배를 타고 임진강과 한강하류를 거쳐 강화도로 가게된다.. 가는 도중 지금의 김포시 대고젼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에 해협이 협소하여 급류가 흐르는 목에 닿게되었다

고종은 뱃길을 없는곳을 향하여 배를 젓는손돌이를 의심하여 수차에 걸쳐 뱃길을 잡도록 주의를주나

손돌이는 그때마다 보기에는 앞이막힌듯 하오나 좀더 나아가면 길이 트인다고 유념해달라... 진언한다

초조해진 고종은 자신을 해하려는 손돌이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이를 참수하라고 명하였고

손돌이는 죽음에 직면하고도 안전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를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것을 아뢰고 참소되고 말았는데 이후 왕은 험한 뱃길을 빠져나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한다

왕은 그때서야 깨달아 손돌이를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서당까지 세워주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 뱃길목은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베었다 하여 손돌목.. 이라 하며 그리고 매년 음력 10월20일쯤이면

손돌이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하여 이때의 거센바람을 손돌이바람... 선돌추위라고도 한다..

 

 충성스러운 백성앞에 고집쎄고 한치앞을 내다보지 못한 요즘 인듯해서 내용은 듣는동안 답답했다..ㅡㅡ

 

손돌목은 인천 앞바다에서 마포나루까지 올라가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목으로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서

강화군 광성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을 일컫는데 이곳은 평상시에는 세곡미를 운반하는 뱃길로 이용되었으며

전쟁시에는 적을 방어하는 진지로 사용되었다 한다

손돌목은 고려이래 조선말까지 경제적뿐만아니라 군사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곳이였다

 

 

 

덕포진은 당시 포대가 일부 손상되기는 하였지만 거의 원형에 가깝게 유지되어있었고

당시 사용했던 화포가 포가에 얹혀진원형 그래도 출토됨에 따라 당시의 국방체제를 재확인할뿐더러

화포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으며 화포는 덕포진 전시관에 전시되어있어서 볼수있다

 

예전에는 무슨생각으로 덕포진을 다녀왔는지 모를정도로 역사가 아주 깊은곳이였다

이런곳을 남는시간에 끼어넣기 식으로 여행을 다녔으니 먹고 놀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나싶다

그냥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내용들만 기억하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다녀온 내 여행지는

하얀도화지처럼 깨끗하다는걸 느끼기도 했으며 이제 도화지에 다시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해본다